이 집은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1845∼1915) 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유래가 있는 집이다. 그의 나이 42세 때(1885)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옛집이다.
가옥은 앞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층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래층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로 방이 한 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붙어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아래방·마루방이 1칸씩 배열되어 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 방이 놓이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뻗어 앞채의 아래방에 접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워 장식하였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그의 애국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백하구려(白下舊廬)」는 김대락(金大洛)(호 백하(白下))이 42세 때인 1885년 4월 19일에 건축한 것으로 보이는 고가에 향유인 금상기(琴相基)가 김대락의 사후에 쓴 현액이다. 이 현액에 따라 이름붙여진 이 고가의 중요성은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출범시킨 산실(産室)이라는 점인 동시에 건축주 김대락이 개화와 독립에 참여하여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된 인물이라는 연계성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협동학교의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협동학교(協東學校)는 당시 안동지방의 애국계몽운동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던 학교로서 고루한 안동유림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 학교의 중심적 인물은 설립자 유인식(柳寅植)(동산(東山)) ·김후병(金厚秉)(창암(蒼菴)) ·이상희(李象羲)(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하중환(河中煥)(지봉(砥峯)) ·김긍식(金肯植)(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등 인사와 교사 이관직(李觀稙), 그리고 장소 제공자 김대락(金大洛)(백하(白下)) 등이었다. (교남교육회잡지 2권 11호 P.28 학계휘문(學界彙聞) 참조)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는 거의 만주(滿洲) 통화현(通化縣)과 유하현(柳河縣)을 잇는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고 협동학교의 졸업생 김성노 ·이운형 ·유기동 ·유림 등 상당수가 역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3 ·1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대한민국건국훈장(大韓民國建國勳章)(단장(單章))이,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은 대한민국건국훈장(大韓民國建國勳章)(복장(複章))이, 백하(白河) 김대락(金大洛)은 대한민국건국훈장(大韓民國建國勳章)(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된 인물이다.
이 집은 구한말과 일제 초에 국민계몽과 광복운동에 몸바친 백하 김대락(1845∼1915) 선생의 고택으로 사랑채를 확장하여 1907년 이 지역 최초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개교했던 유래가 있는 집이다. 그의 나이 42세 때(1885) 세운 것으로 보이는 옛집이다.
가옥은 앞면 8칸으로 서쪽 4칸은 사랑채이고 동쪽 4칸은 중문간을 비롯한 아래채이다. 사랑채는 막돌로 쌓은 2층 기단 위에 서 있으며, 아래층 기단은 앞쪽으로 3m가량 돌출되어 있는데 협동학교 교사로 쓰기 위해 사랑채를 확장할 때 넓힌 것으로 보인다.
앞에 쪽마루가 설치된 동쪽 2칸은 큰사랑방이고 이 사랑방 서쪽 뒤로 방이 한 칸 붙어 있어 안마당으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아래채는 사랑방과 붙어 중문간이 있고 동쪽으로 광·아래방·마루방이 1칸씩 배열되어 있다.
안채는 전면이 개방된 3칸 대청을 중심으로 동쪽에 남북으로 긴 2칸 방이 놓이고, 그 앞으로 2칸 부엌이 뻗어 앞채의 아래방에 접하였다. 안채와 사랑채 모두 간소한 구조이지만 안채 대청 앞면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워 장식하였다.
당시 협동학교의 교사로 쓰던 건물은 광복운동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처분되어 사라졌지만 지금도 건물이 서 있던 축대와 초석 일부가 사랑채 앞에 남아 있어, 그의 애국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백하구려(白下舊廬)」는 김대락(金大洛)(호 백하(白下))이 42세 때인 1885년 4월 19일에 건축한 것으로 보이는 고가에 향유인 금상기(琴相基)가 김대락의 사후에 쓴 현액이다. 이 현액에 따라 이름붙여진 이 고가의 중요성은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출범시킨 산실(産室)이라는 점인 동시에 건축주 김대락이 개화와 독립에 참여하여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된 인물이라는 연계성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협동학교의 역사적 이해가 필요하다.
협동학교(協東學校)는 당시 안동지방의 애국계몽운동에서 중추적 위치에 있던 학교로서 고루한 안동유림을 계몽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후에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투사들의 산실이기도 했다. 이 학교의 중심적 인물은 설립자 유인식(柳寅植)(동산(東山)) ·김후병(金厚秉)(창암(蒼菴)) ·이상희(李象羲)(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하중환(河中煥)(지봉(砥峯)) ·김긍식(金肯植)(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등 인사와 교사 이관직(李觀稙), 그리고 장소 제공자 김대락(金大洛)(백하(白下)) 등이었다. (교남교육회잡지 2권 11호 P.28 학계휘문(學界彙聞) 참조) 여기에 참여하고 있는 인사는 거의 만주(滿洲) 통화현(通化縣)과 유하현(柳河縣)을 잇는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고 협동학교의 졸업생 김성노 ·이운형 ·유기동 ·유림 등 상당수가 역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3 ·1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대한민국건국훈장(大韓民國建國勳章)(단장(單章))이,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은 대한민국건국훈장(大韓民國建國勳章)(복장(複章))이, 백하(白河) 김대락(金大洛)은 대한민국건국훈장(大韓民國建國勳章)(애족장(愛族章))이 추서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