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암서원-향교/서원/서당/재사 - 문화유산 - 안동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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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학문과 예의를 숭상했던 유교문화의 맥! 민속문화의 보고!!

향교/서원/서당/재사

유암서원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상세설명

자원설명

  • 문화재분류 : 서원
  • 시 대 : 조선시대
  • 소재지 :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안동시에서 도산서원 방면으로 안막재를 넘어 중앙선 철도 밑 국도를 지나 좌측편 명잣 방면 군도를 따라 이하역 앞 길로 이상리 마을 뒤편 저수지 위 고개를 넘어 두루 마을 옆 산 밑 북향에 위치하며 안동시청에서 10km지점 진성이씨 경류정 종택 건너편에 소재함. 이 서원은 낙금헌 이정백(樂琴軒 李庭栢) 선생(1553~1600)을 祭享하기 위해 사림에서 세운 서원이다.
그 기원은 두루마을 남쪽 기슭에 퇴계 선생이 왕래하며 강학하던 서재에서 비롯한다.
그 후 동구 밖으로 옮겨 유암서당을 짓고 송계(松溪)선생(李亭男, 生員進士)과 송간(松澗)선생(李庭檜, 縣監),낙금헌 선생을 列享 하였다. 다시 두루마을 앞 지금의 서원자리에 移建하고 사림의 공의로 유암이사(流巖里社)가 되었다. 1787년 서원 훼철령에 따라 송계, 송간 양선생을 북후 물한에 소재하는 작산사(鵲山祠)로 移奉하고 낙금헌 선생 위패는 매판(埋板)한 뒤 묘우와 동서재는 모두 헐리게 되고 강당 10여간이 남아 청년강습 장소로 사용되었다.
100여년 지난 뒤 암고공(巖皐公, 李秀杰, 眞城人)의 발의로 복설을 추진하여 사림과 진성 이씨 후손들의 수연금(收捐金)으로 垈畓을 매입하고 동서재 2간과 존덕사, 전사청 등을 신축하여 유암서원으로 승격하고 낙금헌 선생을 제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낙금헌 선생은 1553년 와룡면 주하리 진성이씨 慶流亭 종택에서 출생하고 36세에 式年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40세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倡義하여 대장에 추대됨. 열읍향병이 예천 용궁에 이르러 대장자리를 金垓公(號 近始齊, 承文院 正字)에게 양여하고 裴龍吉公(號 琴易堂, 翰林)과 좌우 부장으로 협모함.
안동, 예천, 상주, 의성, 군위 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거둠. 이듬해 밀양으로 이진하고 응천, 경주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던 중 2년간의 전란으로 인하여 병을 얻고 가마에 실려 돌아옴.
서애 선생이 공의 행의를 조정에 천거하여 慶基殿 參奉에 제수하였으나 전란에 임하여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고 관직을 받는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나아가지 아니함. 만년에 강학을 위해 집 남쪽에 小齊를 지어 樂琴軒이라 扁額하고 自號로 삼았으며 거문고를 벗삼아 안분양병함.
서원 건너편 경류정 종택(경북 민속자료 72호) 앞에 세종조 때 영변판관을 지낸 李禎公(선산도호부사, 중이조참판)이 평안도 약산에서 옮겨심은 600년된 뚝향나무(천연기념물 314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