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호의 절경과 다양한 유교문화유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퇴계 선생은 청량산을 유독 사랑했다. 주자가 무이산을 예찬했듯 퇴계 선생은 청량산을 이상향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퇴계 선생은 어려서 청량산 자락에서 숙부로부터 논어를 배웠다. 청량산은 원효와 김생도 수행했다는 곳이다. 퇴계 선생이 다니시던 길은 처음에는 둑길, 나중에는 험하지도 않고 넓지도 않은 숲 좋은 오솔길이다. 오솔길은 숲을 가로지르고, 강변을 옆구리에 낀 채 언덕을 넘어 지줄지줄 이어진다. 소나무, 느티나무 향기가 코끝을 파고들고, 돌자갈을 핥고 넘어가는 낙동강 여울물소리, 묵은 낙엽이 켜켜이 쌓인 오솔길을 혼자 걷노라면 저절로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다. 퇴계 선생이 경치 좋은 곳마다 남겼던 시를 읊으며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시인의 경지에 빠지게 되고, 오르막이었다가 다시 내리막길이 이어지는 길을 계속 걷다보면 철저한 적막 속에 자신이 어느덧 퇴계 선생이 되어버리는 길이 퇴계오솔길, 즉 퇴계 선생께서 다니시던 길이다.
퇴계 선생의 15대손인 이동은 옹(100)은 "퇴계 선생은 청량산을 마음에 두고 많이 다니셨다."며 "근동의 선비들과도 함께 청량산을 찾았다는 시도 남기셨다."고 했다. 퇴계 선생의 영향으로 청량산을 둘러보고 유람기나 시를 남긴 사람은 100여 명. 시는 1,000여 편에 달한다. 청량산은 영남 선비들 마음의 수행 길이었음은 분명하다. 퇴계 선생 시 한 수를 살펴보자.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
퇴계 선생은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다. 산에 가는 것 자체가 마음 수행, 지식 수행이란 뜻이다.
사실 소요와 산책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자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줬다.
루소는 '나는 걸으면서 명상에 잠길 수 있다. 나의 마음은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는 '걸으면서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고백했으며, 니체는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고 했다. 칸트는 매일 오후 5시 그의 고향 퀘니히스베르그의 마을길을 산책, 마을 사람들이 칸트를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과 야스퍼스, 막스베버, 괴테가 걸었던 '철학자의 길'이 있다. 소크라테스와 당대의 철학자들도 산책을 하면서 의견을 펼쳤기에 소요학파란 이름까지 얻었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지 다산초당에서 강진 백련사까지 오솔길을 걸으며 '목민'(牧民)을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걷기는 단순한 다리 운동이 아니라 머리와 마음을 깨우쳐 주는 사색의 방법이다.
시각과 청각, 후각 그리고 촉각으로 느끼는 이 강변길은 그 자체로 낭만적이지만, 그것으로만 끝낸다면 퇴계 선생이 섭섭해 할지도 모른다. 남은 한 가지는 머리로 사유하는 유산(遊山)! 글자 그대로 풀면 '산에서 놀다', 산에서 놀면서 길을 가라는 것이다.
퇴계오솔길에서 왜 '유산(遊山)'을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면 퇴계 선생이 왜 이 길을 걸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퇴계 선생은 13세 때 숙부인 송재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위해 청량산으로 가며 집에서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50리 강변길을 만나게 된다. 이후 퇴계 선생은 64세까지 이 길을 대여섯 번 더 왕래했는데,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극찬할 만큼 이 길을 아꼈다. 청량산으로 가는 길에서도 그는 공부를 했다. '유산(遊山)은 독서와 같다.'고 했으니, 산에서 놀며 가는 것이 공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길을 걷는 것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다. 머리와 마음을 깨우쳐 주는 사색, 퇴계오솔길 걷기 여행을 완성시키는 것은 유산(遊山) 정신이다.
이 길은 퇴계 선생만 걸은 것이 아니다. 퇴계 선생을 신봉하던 수많은 유학자들이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 선생을 뵙고 퇴계 선생이 걸었던 길을 따라 청량산까지 걸었다. 퇴계 선생은 유산(遊山)하는 자는 유록(遊錄)을 남겨야 한다고 했고, 그게 일종의 지침이 되어 당대 선비들 사이에선 청량산 기행문 쓰기가 일종의 유행이 되었다. 청량산박물관에 따르면 지금 남아있는 청량산 유람록만도 족히 여든을 헤아린다고 한다.(민속원에서 발간한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Ⅰ' 참고)
이렇게 퇴계 선생과 퇴계 선생 제자들이 걸었던 청량산까지의 길은 9.5㎞ 정도가 된다고 한다. 퇴계오솔길은 그 일부인 셈이다. 이 길은 '녀던 길'이라고 불렸는데, '다니던 길'이라는 뜻에서 지금은 '옛날 길'이라는 뜻의 '예던 길'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군데군데 끊어진 구간이 많지만 상당 구간은 옛길 그대로 남아 있어 복원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퇴계 이황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극찬한 퇴계오솔길은 안동시 도산면의 백운지교에서 시작된다. 일부는 아스팔트로 포장되고 일부는 흔적조차 사라졌다. 하지만 백운지교에서 미천장담∼경암∼한속담∼학소대∼농암종택∼월명담∼고산으로 이어지는 6㎞ 길이의 강변에는 500여 년 전 퇴계가 다니던 옛길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퇴계오솔길 구간은 도산서원에서 조금 떨어진 이육사문학관 뒤쪽에서 농암종택까지의 숲길(3㎞)이다. 경북도의 옛길 복원 사업 1호로 최근 단장됐다. 옛길 복원 사업으로 단장되기 전까지는 동네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다니지 않던 길이었다.
고갯마루에서 농암종택을 잇는 3㎞ 길이의 강변길은 전형적인 오솔길이다. 퇴계 선생의 시심을 불러일으킨 낙동강 상류의 절경은 지명처럼 유난히 흙과 돌이 붉은 단천(丹川)에서 농암종택 사이에 숨어 있다.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원시의 낙동강은 시냇물로 흐르다 청량산을 만나면서 강폭을 넓힌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강이 되었다.’고 말했다.
퇴계 선생이 걷던 길은 농암종택에서 아스팔트길을 따라 청량산까지 이어지지만 오솔길은 아쉽게도 이곳에서 막을 내린다. 어린 시절 청량산으로 공부하러 가던 길에 낙동강 상류의 선경에 취했던 퇴계 선생은 예순네 살까지 이 길을 대여섯 번 더 왕래하며 바위와 소, 협곡, 단애를 주제로 수십 편의 시를 남겼다. 사서삼경을 옆구리에 낀 어린 퇴계 선생과 말을 탄 늙은 퇴계 선생이 수풀 속에서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퇴계오솔길. 외줄처럼 가늘고 긴 이 길은 묵향 그윽한 산수화를 닮았다.
16세기 조선의 대(大) 학자 퇴계 선생이 걸었던 길이, 일부 구간이긴 하지만,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품고 옛 모습 그대로 오롯이 남아있는데다, 길 주변 풍광 또한 평화롭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퇴계오솔길에 스민 퇴계 선생의 심오한 사상은 현재에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